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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키 마토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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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가키 마토메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 함대 참모장, 제1전대 사령관, 제5항공함대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그는 진주만 공격을 위한 작전 수립에 기여했으며, 미드웨이 해전, 필리핀 해 해전, 레이테 만 해전에 참전했다. 종전 후 특공 공격을 감행하여 사망했으며, 그의 일기 "전초록"은 태평양 전쟁의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그의 행적은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특히 종전 후의 행동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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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키 마토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우가키 마토메 (1942–45)
우가키 마토메 (1942–45)
본명우가키 마토메 (宇垣 纏)
출생1890년 2월 15일
출생지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사망1945년 8월 15일
사망 장소오키나와섬 해상
묘소다마 령원
군사 경력
소속일본 제국 해군
복무 기간1912년 – 1945년
최종 계급해군 중장
주요 참전제1차 세계 대전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해 해전
레이테 만 해전
시부얀해 해전
사마르 해전
일본 본토 전투
화산 열도 및 류큐 열도 전역
오키나와 전투
지휘야쿠모
휴가
해군 군령부
제8전대
제1전대
제5항공함대
훈장
욱일대수장
욱일대수장 (사후 추서)
별칭
별칭철가면, 황금가면

2. 초기 생애 및 경력

1890년 2월 15일, 오카야마현에서 태어났다.[18] 오카야마 중학교 졸업 후 해군병학교육군사관학교에 모두 합격하였고, 1912년 해군병학교 40기를 우수한 성적(144명 중 9등)으로 졸업했다.[19] 이후 해군 포술 학교 고등과와 해군대학교 갑종 과정을 거치며 엘리트 장교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자세한 성장 과정과 학창 시절, 초기 군 경력은 아래 문단에서 설명한다.

2. 1. 출생과 성장

1890년 (메이지 23년) 2월 15일, 오카야마현 아카이와군 카타세무라(현 오카야마시 히가시구 세토초 카타세)의 농가에서 교사인 아버지 젠조의 아들로 태어났다.[18] 우가키 가즈시게 육군 대장, 우가키 간지 해군 중장은 근처 동족이지만 직접적인 친척 관계는 아니다.[18]

오카야마 중학교를 졸업한 후, 해군병학교육군사관학교 제24기에 모두 합격했으며, 육군사관학교 합격 성적은 12등이었다. 1909년 (메이지 42년) 9월 11일, 해군병학교 제40기에 150명 중 9위의 성적으로 입교했다.[19] 해군병학교 동기로는 오니시 타키지로, 야마구치 타몬, 타다 타케오 등이 있었으며,[20] 특히 야마구치 타몬과 스즈키 요시오와는 친밀한 관계였으나, 이들은 모두 제2차 세계 대전전사했다.

1912년 (메이지 44년) 7월 17일, 해군병학교를 144명 중 9위의 성적으로 졸업하고[19] 소위 후보생이 되었다. 사관후보생 시절에는 장갑순양함 아즈마에 승선하여 호주로 훈련 항해를 다녀왔다.[4] 1913년 5월 1일에는 방호순양함 히라도로 전출되었고,[4] 같은 해 12월 1일 소위임관했다.[4] 이후 1914년 5월 27일 순양전함 이부키에 배속되었다.[4]

어린 시절부터 자존심이 강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상관에게 경례를 잘 하지 않고, 동기 중 성적이 낮은 이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하급자에게 경례를 받을 때는 "오우"라고 대답하며 자만심을 드러내 해군 내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그의 오만한 태도 때문에 "황금가면"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2. 2. 해군병학교 시절

오카야마현 아카이와군 (현재 오카야마시에 속함)의 농가에서 태어난 우가키는 1909년 9월 11일 일본 제국 해군병학교 제40기로 입교했다.[4] 1912년 7월 17일, 144명의 졸업생 중 9등의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고[4] 소위 후보생이 되었다. 해군병학교 동기생으로는 훗날 제2차 세계 대전전사한 야마구치 타몬과 스즈키 요시오 등이 있으며, 우가키는 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사관후보생 시절에는 장갑순양함 아즈마에 배치되어 호주로 훈련 항해를 다녀왔다.[4]

1913년 5월 1일에는 방호순양함 히라도로 옮겼고,[4] 같은 해 12월 1일 소위임관했다.[4] 이후 1914년 5월 27일에는 순양전함 이부키에 배속되었다.[4]

2. 3. 초기 군 경력

오카야마현 아카이와군 (현재 오카야마시에 속함)의 농가에서 태어난 우가키는 1909년 9월 11일에 일본 제국 해군병학교에 입학[4]하여 1912년 7월 17일에 제40기로 졸업했다.[4] 그는 144명의 사관 후보생 중 9등을 차지했으며, 해군병학교 동기생인 야마구치 타몬과 스즈키 요시오와 친했는데, 이들은 모두 제2차 세계 대전전사했다. 그는 장갑순양함 아즈마에서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하며, 해당 함선을 타고 호주로 훈련 항해를 했다.[4]

1913년 5월 1일,[4] 그는 방호순양함 히라도로 전출되었으며, 1913년 12월 1일 소위임관했다.[4] 그는 1914년 5월 27일 순양전함 이부키에 배속되었다.[4] 1918년 12월 1일,[4] 우가키는 해군 포술 학교에 입학했고,[4] 이후 1919년 12월 1일에 구축함 미네카제의 수석 포술 장교로 배치되었다.[4] 1921년 12월 1일에 부 포술 장교로 순양전함 콩고로 복귀했다.[4] 콩고에 탑승하는 동안 중국, 다롄, 칭다오, 러시아, 블라디미르 만에서 작전을 수행했고, 진해를 방문했다.[5]

1922년 12월 1일, 우가키는 해군대학교 海軍大学校|카이군 다이가코일본어에 입학했다.[4]

3.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일본은 1914년 8월 23일 제1차 세계 대전연합국 편으로 참전했다. 전쟁 초기 우가키는 순양전함 ''이부키''에 탑승하여 인도양에서 독일 제국 해군의 경순양함 ''엠덴''을 수색하는 연합군 작전에 참여했다. 또한 영국 해군의 장갑순양함 ''미노타우르''와 방호순양함 ''피라머스''와 함께 뉴질랜드 원정군 주력을 뉴질랜드에서 태즈먼 해를 거쳐 앨버니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로열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의 경순양함 ''시드니''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중동으로 향하는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 육군 군단 수송선단을 호위했다. 우가키는 ''이부키''에 탑승 중이던 1915년 12월 1일 소위로 진급했다.[4]

이후 우가키는 1916년 12월 1일 순양전함 ''콩고''로 전출되었다.[4] ''콩고''는 비행기 운용 실험을 진행했으며, 우가키가 근무하는 동안 중국 해역에서 작전을 수행했다.[5] 1917년 9월 10일에는 장갑순양함 ''이와테''에 배속되었고,[4] 1918년 3월 2일부터 7월 6일까지는 일본 해군사관학교 제45기 생도들을 태우고 장갑순양함 ''아사마''와 함께 북아메리카 서해안으로 훈련 항해를 나섰다.[4][6] 1918년 8월 1일에는 구축함 ''나라''로 재배치되었으며,[4] 1918년 11월 11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함선에 탑승했다.

4. 전간기 활동

1918년 12월 1일에 해군 대위로 진급한[4] 우가키는 해군포술학교에 입학했다.[4] 이후 1919년 12월 1일에 구축함 미네카제의 수석 포술장으로 배치되었고,[4] 1921년 12월 1일에 부 포술장으로 순양전함 공고로 복귀했다.[4] 공고 탑승 기간 동안 중국, 다롄, 칭다오, 러시아, 블라디미르 만에서 작전을 수행했고, 대한민국진해를 방문했다.[5]

1922년 12월 1일, 우가키는 해군대학교 갑종 학생으로 입학했다.[4] 1924년 11월, 22기 졸업생으로 졸업했고, 1924년 12월 1일 해군 소좌로 진급하여[4] 경순양함 오이에서 포술장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4] 1925년 12월 1일, 그는 해군 군령부의 참모가 되었고[4] 해군포술학교의 참모로 약 3년 동안 근무했다. 1928년 11월 15일에 그는 독일(바이마르 공화국)에 주재 무관으로 임명되었고,[4] 1928년 12월 10일에 해군 중좌로 진급했다.[4]

1936–38년 함장으로 재직 중인 우가키.


1930년 11월 1일에 일본으로 소환되어[4] 우가키는 1930년 12월 1일 제3순양함전대의 참모 장교로 임명되어 바다로 돌아갔고,[4] 이후 1931년 12월 1일 제2함대의 참모 장교가 되었다.[4] 우가키는 1932년 11월 15일 해군대학교 교관이 되었고 1932년 12월 1일 해군 대좌로 진급했다.[4] 1935년 10월 30일, 우가키는 연합함대의 참모 장교로 임명되었고, 1936년 12월 1일 장갑순양함 야쿠모의 함장으로 첫 지휘를 맡았다.[4] 1937년 6월 7일부터 10월 19일까지 ''야쿠모''는 일본 해군 사관학교 64기생을 태우고 그의 지휘 아래 수에즈지중해로 훈련 항해를 했다.[7] 1937년 12월 1일, 그는 중일 전쟁 동안 일본의 중국 남부 해안 봉쇄 작전의 일부로 작전을 수행한 전함 휴가의 지휘를 맡았다.[8]

우가키는 1938년 11월 15일에 소장으로 진급했고[4] 1938년 12월 15일에 해군 군령부 제1부(작전) 부장이 되었다.[4]

5.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해당 섹션의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이미 상세하게 다루고 있으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내용을 작성하지 않는다.

5. 1. 태평양 전쟁 발발 이전

1918년 12월 1일에 소위로 진급한[4] 우가키는 해군 포술 학교에 입학했고,[4] 이후 1919년 12월 1일에 구축함 미네카제의 수석 포술 장교로 배치되었다.[4] 1921년 12월 1일에는 부 포술 장교로 콩고로 복귀했다.[4] 콩고 승선 기간 동안 중국, 다이렌, 칭다오, 러시아, 블라디미르 만에서 작전을 수행했고, 대한민국 진해를 방문했다.[5]

1922년 12월 1일, 우가키는 해군대학교에 입학했다.[4] 1924년 22기로 졸업하고, 같은 해 12월 1일 중령으로 진급하여[4] 경순양함 오이에서 포술 장교로 근무를 시작했다.[4] 1925년 12월 1일, 그는 일본 제국 해군 참모부의 참모가 되었고[4] 해군 포술 학교의 참모로 약 3년간 근무했다. 1928년 11월 15일에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 주재 장교로 임명되었고,[4] 같은 해 12월 10일에 소령으로 진급했다.[4]

1930년 11월 1일 일본으로 소환된[4] 우가키는 1930년 12월 1일 제3 순양함 사단의 참모 장교로 임명되어 다시 해상 근무를 시작했고,[4] 이후 1931년 12월 1일 제2 함대의 참모 장교가 되었다.[4] 우가키는 1932년 11월 15일 해군대학교 교관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 1일 대령으로 진급했다.[4] 1935년 10월 30일, 우가키는 연합 함대의 참모 장교로 임명되었고, 1936년 12월 1일 훈련함 야쿠모지휘관으로 첫 함장직을 맡았다.[4] 1937년 6월 7일부터 10월 19일까지 야쿠모는 일본 해군 사관학교 64기생을 태우고 그의 지휘 아래 수에즈지중해로 훈련 항해를 했다.[7] 1937년 12월 1일, 그는 중일 전쟁 동안 일본의 중국 남부 해안 봉쇄 작전에 참여한 전함 휴가의 지휘를 맡았다.[8]

우가키는 1938년 11월 15일에 소장으로 진급했고[4], 같은 해 12월 15일에 해군 참모부 제1국(작전) 국장이 되었다.[4] 그는 1941년 4월 10일 중순양함 토네 및 치쿠마로 구성된 제8 순양함 사단을 지휘했다.[9]

5. 2. 연합함대 참모장 시절

1941년 8월, 우가키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 휘하 연합함대참모장으로 임명되어, 야마모토가 사망할 때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9] 원래 대함거포주의자였던 우가키는 항공력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했으나,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의 참모장으로 취임하자 기존의 생각을 바꾸고 야마모토의 주장에 동조했다. 특히 야마모토가 구상한 진주만 공격 계획이 군령부의 반대에 부딪히자, 우가키는 군령부를 상대로 설명과 설득을 담당하며 작전 승인을 얻어내는 데 기여했다.

1941년 8월부터 1942년 2월까지 연합 함대 기함 나가토의 함교에 있는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우가키 마토메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진주만 공격 이후 연합함대 사령부 내에서는 제1항공함대가 추가 공격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우가키는 이미 시기를 놓쳤다고 판단하여 이에 반대했다. 그는 1942년 11월 1일에 중장으로 진급했다.[9]

1942년 4월 말, 전함 야마토에서 미드웨이 작전을 위한 도상 훈련(워게임)이 실시되었다. 이 훈련에서 우가키는 통감, 심판장, 청군(일본군) 장관의 1인 3역을 맡았는데, 일본 함대에 불리한 결과가 나올 때마다 판정을 번복하거나 유리하게 수정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45] 예를 들어, 미 항공모함 부대의 출현으로 일본 항공모함에 큰 피해가 발생하여 작전 속행이 어렵게 되자, 우가키는 심판 재실행을 명령해 피해를 줄이고 훈련을 강행했다.[46] 항공모함 가가아카기가 침몰 판정을 받았음에도, 우가키는 가가의 침몰을 없던 일로 하고 아카기의 피해를 경미한 것으로 변경했다.[47] 또한 미일 전력비를 일방적으로 3:1로 적용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48] 이러한 무리한 진행으로 인해 도상 훈련은 작전 계획의 문제점을 검토하고 개선하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웠으며,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혼란을 야기했다는 지적이 있다.[52][53] 우가키는 훈련 후 "연합함대는 이렇게 되지 않도록 작전을 지도할 것"이라고 말했지만[50], 이는 결과적으로 작전의 위험성을 간과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1942년 6월 5일부터 6일까지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는 대패를 당했다. 연합함대 사령부의 다른 참모들이 공황 상태에 빠진 것과 달리, 우가키는 냉정함을 유지하며 참가 부대를 통솔하고 철수를 지휘하여 위기 관리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55] 해전 후 우가키는 자신의 일기인 전조록에 제1항공함대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했으며[58], 패인을 분석하며 대공포 강화, 레이더 활용, 대잠 장비 확충의 필요성을 인식했다.[61] 또한 해전에서 전사한 자신의 동기 야마구치 다몬을 "급우 중 가장 우수한 인재"라 칭하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60]

1942년 8월 초, 미군이 과달카날 섬에 상륙하자 우가키는 전함 "야마토"를 타고 트럭 정박지로 이동하여 연합함대 참모장으로서 과달카날 전투 지도를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야마모토는 기존의 참모였던 구로시마 가메토보다 우가키에게 더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62] 우가키는 이후 남태평양 해전, 제3차 솔로몬 해전, 이호 작전 등 주요 작전을 지도했다.

1943년 4월 18일, 우가키는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함께 1식 육상공격기 2기에 나누어 타고 솔로몬 제도의 부건빌 섬 상공에서 전선 시찰 중, 미 미국 육군 항공대 소속 P-38 라이트닝 전투기들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이 공격은 미군의 암호 해독 성공으로 이루어진 복수 작전이었다. 야마모토가 탑승한 항공기는 격추되어 야마모토는 전사했고, 우가키가 탑승한 항공기는 바다에 추락했다. 우가키는 조종사, 경리 장교와 함께 3명의 생존자 중 한 명이 되었으나 중상을 입었다.[9] 그는 야마모토의 유골과 함께 전함 무사시를 타고 일본으로 귀환했으며, 야마모토의 유품으로 단도를 받았다. 우가키는 자신의 일기인 전조록에 "평소 야마모토 장관의 대역이 되리라 각오했던 몸이, 장관을 잃고, 오히려 생환했다"라고 적으며 비통한 심정을 드러냈다.[64] 부상 중에도 그는 부하에게 구술하여 전조록 기록을 계속 이어갔다.[65] 1943년 5월 22일, 부상 치료를 위해 해군 참모부에 배속되면서 연합함대 참모장 임기를 마쳤다.[9]

5. 3. 제1전대 사령관 시절

1943년 4월 18일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과 함께 미쓰비시 G4M 폭격기를 타고 이동하던 중 미국 육군 항공대 전투기의 공격으로 격추당했으나, 바다에 추락한 기체에서 생존자 3명 중 한 명으로 구조되었다.[9] 부상에서 회복된 후, 우가키는 1944년 2월 25일 전함 나가토, 야마토, 무사시로 구성된 제1전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9] 처음에는 나가토기함으로 삼았으나,[10] 1944년 5월 초에 기함을 야마토로 옮겼다.[11]

1944년 5월 27일 미군이 비악에 상륙하자, 우가키는 비악 사수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일본 제국 해군이 섬 구원을 위한 콘 작전을 계획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12] 1944년 6월 10일, 우가키는 콘 작전 부대의 전체 지휘관으로 추가 임명되었고,[13] 부대는 필리핀의 타위타위에서 출항했다.[10][11][14] 그러나 1944년 6월 12일 미군이 사이판을 폭격하며 마리아나·팔라우 제도 전역이 시작되자 콘 작전은 연기되었다.[10][11][14] 제1전대는 마리아나 제도 방어를 위해 이동하는 기동 부대의 선두 부대에 합류했다.[10][11][14]

이어진 필리핀 해 해전(1944년 6월 19일~20일)에서 우가키가 지휘하는 전함들은 일본 항공모함을 방어하며 미 해군 항공기와 교전했다. 이 전투에서 제1전대는 나가토기관총 공격을 받은 것 외에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10][11][14] 결국 콘 작전은 취소되었다.

우가키는 1944년 10월 23일부터 10월 26일까지 벌어진 레이테 만 해전에서도 제1전대를 지휘했다. 이 전투는 일본 해군에게 비극적인 결과를 안겨주었다. 10월 24일 시부얀 해 해전에서는 미군 항공기의 집중 공격으로 제1전대의 전함 무사시가 격침되었다. 10월 25일 사마르 해전에서는 야마토나가토를 포함한 일본 함대가 압도적인 화력 우위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 호위항공모함 부대에 결정적인 피해를 주지 못하고 후퇴했다. 이러한 결과는 우가키의 지휘 능력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44년 11월 15일, 우가키는 일본 본토로 소환되어 해군 참모부에서 근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9]

5. 4. 제5항공함대 사령관 시절

1944년 11월 15일, 우가키는 일본으로 소환되어 해군 참모부에서 근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9] 1945년 2월 10일, 그는 규슈에 주둔한 제5항공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9] 당시 증가하던 미국 육군 항공대보잉 B-29 슈퍼포트리스 폭격 위협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그의 사령부 본부는 동굴 벙커에 마련되었다. 그는 규슈 지역의 모든 해군 항공기를 감독했다. 1945년 3월에는 울리시 환초에 정박 중이던 미 해군 함대에 대한 장거리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 전투가 시작된 후, 그는 4월 한 달 동안 오키나와 섬 부근에서 미 해군 함정에 대한 수백 건의 ''가미카제'' 공격을 포함하는 기쿠스이 작전("국화수")의 첫 번째 파도를 명령했다. 이러한 공습은 오키나와 전역에서 계속되었고, 수많은 연합군 함선에 심각한 표면 피해와 승무원 사상자를 발생시켰지만, 1945년 봄 동안 구축함보다 큰 연합군 군함은 ''가미카제''에 의해 직접 침몰하지 않았다.

한편, 우가키는 더 많은 항공기를 모아 연합군의 공격으로부터 규슈에 숨겨두었고, 예상되는 연합군의 일본 침공 동안 ''가미카제'' 공격에 사용할 계획이었다. 우가키는 결호 작전에서 수백 대의 항공기와 ''신요'' 자폭 공격 모터보트로 수시간에 걸쳐 침공 부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15]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의 종전 선언(옥음방송)이 있자, 우가키는 직속상관인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에게 마지막 특공 공격을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애초에 가미카제 작전에 회의적이었던 오자와 중장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자신의 주장이 묵살되자 우가키는 오자와를 무능하다고 비난하고, 독단적으로 자신의 휘하 11기의 부하들을 이끌고 오키나와를 향해 마지막 특공 출격에 나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자와 중장은 격노했다.

8월 15일 이른 아침, 우가키는 부하 나카쓰루 대위에게 함상폭격기 혜성 5기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다른 부하들이 동행을 자원하여 총 11기의 혜성 폭격기가 준비되었다. 정오에 천황의 항복 방송(옥음방송)을 듣고도 우가키는 자신의 진중일기인 "전초기(戰藻錄)" 마지막 부분을 작성한 후, 나카쓰루 대위가 조종하는 혜성 43형기에 탑승했다. 그는 11기의 항공기와 함께 오키나와로 출격했다. 출격 전, 그는 웃는 얼굴로 마지막 사진을 찍고 중장 계급장이 달린 군복을 입고 이륙했다.

19시 24분에 우가키가 탑승한 비행기(우가키기)에서는 제5항공함대 사령장관으로부터의 결별 전보 발신을 명령하는 전보가 있었다.[109] 우가키는 출격 전에 결별 전보를 막료에게 기안하게 하고, 출격 후에 자신으로부터의 명령이 있는 즉시, 제5항공함대 사령장관으로부터의 공식 전보로 발신하도록 지시했었다.[109] 이어서 20시 25분에 우가키기에서 "와레 기습에 성공했노라"[109] "와레 돌입한다"[109]라고 입전했고, 이어서 돌입을 의미하는 "투"라는 긴 부호(돌입 전보)가 15초 정도 계속되다 끊어졌다.[109] 제5항공함대는 우가키기 이외의 2기에서도 돌입 전보를 수신했다.[96]

특공대는 미군 함정으로부터 격렬한 대공포화를 받았다.[109] 이 특공대에 의한 미군 측의 손해는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109] 하지만 『전사총서 오키나와 방면 해군작전』에는, "우가키기는 미군의 수상기모함에 돌입했다"라는 미군의 비공식 정보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96] 이 근거는, 5항함 시대에 우가키의 참모였던 노무라 료스케의 수기에, 1945년 12월에 미국 폭격 전략 조사단의 모울러 해군 중좌의 조사를 받았을 때 모울러로부터 수상기모함에 명중해 침몰하지는 않았지만 큰 손해를 입었다는 사건이 있었다고 들었다는 내용인 듯하다.[109] 특공으로 피해를 입어 수리에 들어간 수상모함 커티스가 그것으로 여겨졌지만, 하타 이쿠히코의 조사에서는 커티스는 6월에 피해를 입은 것으로 시기가 달랐다고 한다. 미 측 증언에는 종전 당일에 함선이나 지상 시설에 몇 차례 공격이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거나 찢어진 파편이나 흩어진 연료로 화상자가 나왔다는 정도밖에 존재하지 않았다.[108] 노무라의 문답은 착오였던 것으로 보인다.

출격한 11기의 "혜성"에 대해 아래의 사실이 판명되었다.[109]

  • 출발 후 1시간여(타네가시마 부근?)에 1기가 돌입 전보를 발신하고 소식 불명. 미군 측 기록 없음.[108]
  • 이헤야 섬에 2기가 추락.[109] 밤이었기 때문에 1기는 지상 시설에 특공한 것으로 보이나 실패, 다른 1기는 정박해 있던 LST에 특공한 것으로 보이나 실패하여 100m 떨어진 암초에 격돌. 미군 측 기록에 따르면, 후자가 우가키가 탑승한 1번기(조종: 나카즈루 타츠오 대위, 정찰: 엔도 아키아키 비조장, 우가키 총 3명 탑승)로 판단된다.[109]
  • 이에 섬에 1기가 추락.[109] 하지만, 하타 이쿠히코의 조사에 따르면, 동 섬의 수비대는 전멸했고, 주민은 종전 시 다른 섬의 캠프로 옮겨졌기 때문에, 주민이 돌아왔을 때 그럴듯한 비행기의 잔해가 있었지만, 이러한 사실이 8월 15일 종전일에 있었는지 엄밀하게는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98]
  • 이에 수도에서 몇 기가 미군 함선의 대공포화에 의해 격추된다.[109]
  • 1기가 미군 함선을 발견하지 못하고, 미군 육상 시설에 투탄한 후에 귀환을 시도하여 불시착(가고시마현 앞바다로 보이나 불시착한 자세한 장소는 불명. 승무원 2명 중 1명이 생환. 1명은 착수 시의 충격으로 머리를 기기에 부딪혀 사망).[96]
  • 1기가 발진 후 얼마 안 되어 시부시 만 해안에 불시착(승무원 2명 생환).[96]
  • 1기가 발신 후 얼마 안 되어 센다이 강 하구에 불시착(승무원 2명 생환).[96]
  • 총 결과 (『전사총서 오키나와 방면 해군작전』 613 페이지 기술): "돌입 전보 있음: 3기, 돌입한 것으로 인정함: 5기, 불시착: 3기"


이 특공으로 인한 전사자는 우가키를 포함해 18명이었다.[110] 5명이 생환했다.[96]

오이타시의 오스 종합 운동 공원에 있는 "마지막 특공" 위령비에 새겨진 전사자 명단(18명)은 다음과 같다.

번호이름계급 (전사 전)
1우가키 마토메중장
2나카쓰루 타츠오대위
3엔도 아키아키비조장
4이토 유키히코중위
5오키 마사오상비조
6야마카와 시로오상비조
7키타미 타케오중위
8이케다 타케노리중위
9야마다 이사오상비조
10와타나베 미사오상비조
11우치우미 스스무중위
12고토 타카오상비조
13이소무라 켄소위
14마츠나가 시게오이비조
15나카지마 히데오일비조
16후지사키 타카요시일비조
17요시다 토시일비조
18히다카 호일비조



해군 총사령관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은 8월 16일 아침 연합함대 항공참모 후치다 미츠오 대좌에게 "황군의 지휘 통솔은 대명의 대행이며, 사사로운 감정으로 병사 한 명도 움직여서는 안 된다. 옥음방송으로 종전의 대명이 내려진 뒤 병사를 함께 죽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자결하여 특공 장병의 뒤를 따르겠다면 혼자 해야 한다"라고 말했고, 우가키에 대한 감사장은 기안하지 못하게 했다.[111]

우가키의 행위는 정전 명령 후의 이유 없는 전투 행위를 금지한 해군 형법의 제2장 전권의 죄에 있어서 제31조에 저촉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117] 하지만 옥음방송을 "정전 명령", "종전"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견해가 갈리고, 8월 16일 16시에 발해진 대륙명 제1382호 및 대해령 제48호를 정식 정전 명령으로 보는 의견, 또는 9월 2일 항복 문서 조인으로 정식 정전·종전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또한 옥음방송 후의 출격으로 17명[110]의 부하를 희생시켰다는 이유로 유족들의 비난도 받았다. 이 부대를 지휘했던 나카츠루 대위의 아버지는 전후 인터뷰에서 "어째서 우가키 중장이 아들을 데려갔는가"라고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118] 그러나 나카츠루 대위의 유족에 따르면 만년의 아버지는 우가키의 행위를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는 심경에 이르렀다고 한다.[119]

우가키는 위 내규(중장 전사자 중 특정 요건 충족 시 대장 추서)를 충족했지만 대장으로 친임되지 못했다.[116] 해군의 인사 당국자가 남긴 메모에는 "적극적인 공격 중지 명령 발령 후 출격을 강행한 것", "단기 돌입하지 않고 여러 대를 인솔하여 날아간 것"의 두 가지 점이 해군 대신 요나이 미츠마사 대장과 연합함대 사령관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의 의향에 반했기 때문이라고 적혀 있다.[116]

우가키는 전후 한동안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지 않았지만 현재는 합사되어 있으며, 유슈칸 상설 전시에도 우가키를 다룬 코너가 존재한다. 또한 사후에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여받았으며, 1972년 (쇼와 47년) 9월 17일, 고향인 오카야마현 호국 신사 경내에 우가키와 부하의 위령비가 건립되었다.[111]

6. 종전과 죽음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옥음방송을 통해 일본의 항복을 선언하고 군에게 무장 해제를 명령했다. 이 방송을 들은 우가키 마토메는 아직 공식적인 휴전 명령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와, 자신만이 부하들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명분으로 마지막 가미카제 특공을 결심했다. 그는 마지막 일기에 진정한 무사도 정신을 보여주기 위해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겠다고 적었다.[16]

우가키는 직속 상관인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에게 특공 공격 감행을 주장했으나, 가미카제에 반대했던 오자와는 이를 묵살했다.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자 우가키는 오자와를 무능하다고 비난하고 독자적으로 특공을 준비했다. 처음에는 부하 나카쓰루 타츠오 대위에게 함상폭격기 5기를 준비하라고 명했으나, 다른 부하들이 동참을 원하여 총 11기의 혜성 함상폭격기가 준비되었다.

8월 15일 정오에 발표된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고 마지막 "전조록"을 쓴 후, 우가키는 나카쓰루 대위가 조종하는 혜성 43형기에 탑승했다. 그는 출격 전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고, 중장 계급장을 뗀 짙은 녹색 제복을 입었으며, 야마모토 이소로쿠에게 받은 의례용 단도를 지참했다.[16] 우가키가 탑승한 혜성은 원래 2인승이었으나, 정찰원 엔도 아키요시 준위가 내리기를 거부하여 우가키, 나카쓰루 대위, 엔도 준위 3명이 탑승한 채 오이타현 기지를 이륙하여 오키나와를 향했다.

1945년 8월 15일 마지막 가미카제 임무를 수행하기 전의 우가키


엔도 준위는 임무 중 무선 통신을 담당하며 우가키의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다. 19시 24분에 발신된 마지막 통신은 "와레 돌입한다"는 내용과 함께 돌입을 의미하는 긴 부호가 15초간 이어지다 끊어졌다.[109] 그러나 미 해군 기록에는 당일 성공적인 가미카제 공격이 없었으며, 엔진 문제로 귀환한 3기를 제외한 나머지 8기는 바다에 추락했거나 미군의 대공포화에 격추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 날 아침, 미 해군 상륙함 ''LST-926''의 승무원들이 이헤야 섬 해변에서 항공기 잔해와 시신 3구를 발견했다. 세 번째 시신은 머리가 으깨지고 오른팔이 없었으며 짙은 녹색 제복을 입고 있었고, 근처에서 짧은 칼이 발견되어 우가키로 추정되었다.[17] 이들의 시신은 해변 모래에 묻혔다.[17] 우가키의 정확한 사망 원인과 지점은 불명확하며, 미군 함선에 돌입하지 못하고 추락했다는 설, 정전 명령을 어길 수 없었던 나카쓰루 대위가 의도적으로 텐트 근처에 추락시켰다는 설, 단도로 자결했다는 설 등이 존재한다.

우가키의 행동은 포츠담 선언 수락 후 정식 명령 없이 특공을 감행했다는 점에서 전사로 인정받지 못했고, 대장으로 추서되지 못했다.[116] 해군 인사 당국은 "적극적인 공격 중지 명령 발령 후 출격을 강행한 것"과 "단독으로 돌입하지 않고 여러 부하를 이끌고 간 것"이 요나이 미츠마사 해군 대신과 오자와 지사부로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의향에 반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116] 그의 행위는 정전 명령 후 이유 없는 전투 행위를 금지한 해군 형법 제31조 위반이라는 비판도 제기되었으나[117], 옥음방송을 정식 정전 명령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해석 논란이 있다.

또한, 천황의 항복 방송 이후 부하 17명[110](우가키 포함 총 18명 전사)을 희생시켰다는 점에서 유족들의 비난을 받았다. 오자와 지사부로는 "자결하려면 혼자 하지 왜 젊은이들을 끌어넣나"라고 격노하며 우가키에 대한 감사장 기안을 불허했다.[111] 함께 출격했던 나카쓰루 대위의 아버지는 전후 인터뷰에서 우가키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으나, 만년에는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118][119]

우가키는 전후 한동안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지 못했으나, 현재는 합사되어 있으며 유슈칸에도 관련 전시 코너가 있다. 사후 훈1등 욱일대수장이 수여되었고, 1972년 9월 17일 고향인 오카야마현 호국 신사 경내에 우가키와 부하 17명의 위령비("마지막 특공" 위령비)가 건립되었다.[111]

마지막 특공 전사자 (18명)[110]
계급이름
중장우가키 마토메
대위나카즈루 타츠오
비조장엔도 아키아키
중위이토 유키히코
상비조오키 마사오
상비조야마카와 시로오
중위키타미 타케오
중위이케다 타케노리
상비조야마다 이사오
상비조와타나베 미사오
중위우치우미 스스무
상비조고토 타카오
소위이소무라 켄
이비조마츠나가 시게오
일비조나카지마 히데오
일비조후지사키 타카요시
일비조요시다 토시
일비조히다카 호


7. 사후 평가 및 논란

(내용 없음)

7. 1. 긍정적 평가

배우작품명연도제작사/방송사
사사키 코마루태평양의 독수리1953년도호
사사키 코마루격동의 쇼와사 오키나와 결전1971년도호
이나바 요시오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1968년도호
하마다 토라히코토라! 토라! 토라!1970년20세기 폭스
타카하시 코지연합함대1981년도호
카토 타케시영전 불타다1984년도호
스가와라 분타전함 야마토1990년후지 TV
나카무라 이쿠지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2011년토에이
츠가와 마사히코거대전함 야마토 ~승무원들이 바라본 삶과 죽음~2012년NHK BS 프리미엄


7. 2. 부정적 평가

포츠담 선언 수락 후 정식 명령 없이 독단적으로 특공을 감행한 점은 큰 비판을 받았다. 이는 정전명령을 위반한 해군형법 31조 위반 행위로 간주되었으며, 이 때문에 우가키는 전사자로 취급되지 못해 대장으로 추서되지 못했다.

우가키의 마지막 출격 당시 상황과 정확한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지만, 일본 정부는 공식적인 확인을 하지 않고 있다. 출격 전 사진을 근거로 우가키 본인이라는 의견이 많으며, 탑승기가 미군 함선이 아닌 텐트 쪽으로 돌진한 것을 두고, 정전명령을 어길 수 없었던 조종사 나카쓰루 다이이(中津留達雄 大尉)가 고의로 추락했다는 주장도 있다. 기체 안에서 단도가 발견되어 자결했다는 설도 제기되었으나,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이처럼 사망 원인과 지점이 불분명하여, 일각에서는 그가 적함에 돌입해 사망했다는 주장까지 나오기도 한다.

천황의 항복 방송 이후에 부하들을 이끌고 출격하여 희생을 강요했다는 점 역시 유족들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다. 당시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오자와 지사부로는 "자결하려면 혼자 할 것이지 왜 젊은이들까지 끌어들였는가"라며 격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비판 때문에 그는 사후 야스쿠니 신사 합사 대상에서도 제외되었으나, 이후 합사가 이루어져 현재 야스쿠니 신사 유슈칸(遊就館)의 상설 전시장에는 우가키 관련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그의 출신지인 오카야마현 호국 신사 경내에는 우가키와 부하들을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함께 출격했던 나카쓰루 대위의 아버지는 아들을 강제로 끌고 간 우가키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으나, 훗날 NHK 방송 증언에 따르면 만년에는 우가키의 행동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체념한 듯한 태도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7. 3. 논란

우가키 마토메의 마지막 출격은 여러 논란을 낳았다. 출격 전 사진을 근거로 그가 직접 비행기에 탑승했다고 보는 시각이 많으나, 그의 비행기가 연합군 전함이 아닌 텐트 쪽으로 돌진한 점, 기체 안에서 단도가 발견된 점 등을 들어 그의 정확한 사망 원인과 장소는 여전히 불분명하다.[109] 일부에서는 정전 명령을 어길 수 없었던 조종사 나카쓰루 대위가 의도적으로 추락시켰다거나, 우가키가 기내에서 단도로 자결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일본 정부는 공식적인 확인을 피하고 있다. 이로 인해 그가 적함에 돌진하여 사망했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로 사망 경위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포츠담 선언 수락 이후 정식 명령 없이 독단적으로 특공을 감행했기 때문에, 우가키는 전사자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대장으로 추서되지도 못했다. 또한, 그의 행동은 정전 명령을 명시적으로 위반한 것으로, 당시 해군 형법 제31조 위반에 해당한다는 비판이 지배적이었다.

천황의 항복 방송 이후에도 부하들을 이끌고 출격하여 희생을 강요한 점은 유족들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다. 당시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오자와 지사부로는 "자결하려면 혼자 할 것이지, 왜 젊은이들까지 끌어들였는가"라며 격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논란 때문에 우가키는 사후에도 오랫동안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지 못했으나, 현재는 합사가 이루어져 야스쿠니 신사 내 유슈칸 상설 전시장에 그를 다루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그의 출신지인 오카야마 호국 신사 경내에는 그와 함께 전사한 부하들을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특히 함께 출격했던 나카쓰루 대위의 아버지는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우가키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출했으나, 만년에는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을 것"이라며 체념했다고 유족들이 NHK 방송을 통해 증언하기도 했다.

우가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해군 갑 사건 당시 부상당한 우가키의 비서 역할을 했던 에비나 켄조는 그에게 인간적인 면이 있었고 예상보다 따르기 쉬웠으며[121], 가족을 아끼는 마음이 깊었고[122], 젊은 부하나 종병, 심지어 여관이나 요리집 관계자들에게도 의외로 친밀감을 얻었다고 회고했다[123]。 제1전대 사령관 시절 그를 보좌했던 츠즈쿠 타쿠로 소위 역시 우가키가 젊은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왔으며, 자신을 꾸짖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기억했다[109]。 아마쿠라 타카유키는 우가키가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갈 곳 없던 군악대원들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해주었던 일화를 소개하며, 그의 이미지와 다른 온정적인 면모가 있었다고 평가했다[116]

반면, 쿠사카 류노스케 중장은 우가키를 "나무토막처럼 냉담한 남자"라고 평가하면서도[124],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훌륭한 무인이었다"고 언급했다[125]。 마츠다 치아키 소장은 그를 "빨리 달리는 말처럼 힘이 있다"고 묘사했다[126]。 그의 일기인 『전조록』을 영어로 번역한 치하야 마사타카 중좌는 우가키가 자존심이 매우 강하고 오만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상관에게 경례를 잘 하지 않았고, 동기 중에서도 자신보다 성적이 낮은 이들을 무시했으며[127], 하급자의 인사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거나 "어"라고만 답하는 등 거만한 태도를 보여 해군 내 평판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127]。 또한 자신감이 넘쳐 함대 운용 지휘를 참모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함교에 서서 지휘했으며[128], 항상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어 "철가면" 또는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 속 악당인 "황금가면"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전했다. 치하야는 우가키가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는 냉혈한"으로 여겨졌지만, 『전조록』에서 보이듯 가족을 생각하는 의외의 면모도 있었다고 덧붙였다[129]GHQ 전사 실장을 지낸 고든 프랭지는 『전조록』이 요직을 거친 우가키의 견문, 인생 철학, 처세술 등을 엿볼 수 있는 제1급 사료라고 높이 평가했다.

개인적으로는 셰퍼드 "엘리"를 길렀으며, 미드웨이 해전 직후 엘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머리카락을 잘랐다는 일화가 『전조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잘린 머리 스타일이 아닌 얼굴을 쳐다본다고 느꼈다고 적었으며, 머리를 자른 이유에는 패전에 대한 심기일전과 여름 더위 대비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고 덧붙였다[131]。 새로 들인 얼룩 고양이의 모습에 기뻐하기도 했으며[132], 사냥을 즐겨 새 사냥에서는 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그가 잡아 온 새는 전함 "나가토"나 "야마토"의 저녁 식사로 제공되었는데, 우가키와 불화설이 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조차 이때만큼은 기분이 좋았다고 전해진다[133]。 사냥 갈 시간이 없을 때는 전함 현측에서 낚시를 즐기기도 했으며[134], 술을 즐겨 마셨다[62]

우가키가 남긴 『전조록(戦藻録)』은 그가 태평양 전쟁 시기에 기록한 일지로, 여러 판본이 존재한다.

  • 『전조록: 우가키 마토메 일기』 (오가와 간지, 요코이 토시유키 공편), 일본출판협동, 1952년, 상・하권
  • 『전조록』 (메이지 백년사 총서), 원서방, 1968년 (1993년 신장판 간행, 개전 전 50일간 일기 증보)
  • 『전조록』 (감수 반도 카즈토시, 해설 토다카 카즈나리), PHP연구소, 2019년, 상・하권 (신자・신가나판)

8. 유산

그의 일기인 『전조록』은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 해군의 상황과 의사 결정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당시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1급 자료로 평가받는다.[36] 우가키는 1941년 10월 16일부터 이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자신이 사망하는 날까지 기록을 남겼다.[36] GHQ 전사 실장을 지낸 고든 프랭 등 일부 연구자들은 이 일기가 처음부터 공표될 것을 염두에 두고 작성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37] 『전조록』은 전쟁의 실상과 당시 일본 군부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기록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참조

[1] 문서 Nishida, Imperial Japanese Navy
[2] 웹사이트 Ugaki Matome http://navalhistory.[...]
[3] 문서 Ugaki
[4] 문서 Ugaki
[5] 웹사이트 IJN Battleship KONGO: Tabular Record of Movement http://www.combinedf[...] 2018-05-04
[6] 웹사이트 IJN IWATE: Tabular Record of Movement http://www.combinedf[...] 2018-05-04
[7] 웹사이트 IJN YAKUMO: Tabular Record of Movement http://www.combinedf[...] 2021-01-15
[8] 웹사이트 IJN HYUGA: Tabular Record of Movement http://www.combinedf[...] 2017-01-11
[9] 문서 Ugaki
[10] 웹사이트 IJN Battleship NAGATO: Tabular Record of Movement http://www.combinedf[...] 2016-11-01
[11] 웹사이트 IJN Battleship YAMATO: Tabular Record of Movement http://www.combinedf[...] 2016-11-01
[12] 문서 Ugaki
[13] 문서 Ugaki
[14] 웹사이트 IJN Battleship MUSASHI: Tabular Record of Movement http://www.combinedf[...] 2017-12-01
[15] 문서 Ugaki, Fading Victory
[16] 문서 The Last Kamikaze
[17] 웹사이트 D4Y Judy Manufacture Number ???? Tail Code 701-122 https://pacificwreck[...] 2020-07-24
[18] 서적 連合艦隊の名リーダーたち プレジデント社
[19] 서적 良い参謀良くない参謀
[20] 서적 蝦名 特攻機
[21] 서적 戦藻録(九版)
[22] 서적 造船士官の回想 上
[23] 서적 蝦名 特攻機
[24] 서적 本土方面海軍作戦
[25] 서적 蝦名 特攻機
[26] 서적 海軍反省会3
[27] 서적 蝦名 特攻機
[28] 서적 戦藻録(九版)
[29] 서적 戦藻録(九版)
[30] 서적 戦藻録(九版)
[31] 서적 勝つ戦略負ける戦略
[32] 서적 勝つ戦略負ける戦略
[33] 서적 良い参謀良くない参謀
[34] 서적 山本五十六 平凡社
[35] 서적 ハワイ作戦
[36] 서적 日本海軍の驕り症候群 上 中公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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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간행물 ハワイ作戦 戦史叢書
[39] 서적 日本海軍の驕り症候群 上 中公文庫
[40] 문서 戦藻録(九版)
[41] 간행물 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2)昭和十七年六月まで 戦史叢書
[42] 문서 戦藻録(九版)
[43] 서적 ミッドウェー 学研M文庫
[44] 문서 戦藻録(九版)
[45] 문서 山本と黒島, 吉田 大和と武蔵
[46] 간행물 ミッドウェー海戦 戦史叢書
[47] 서적 ミッドウェーの奇跡 上 原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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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간행물 ミッドウェー海戦 戦史叢書
[51] 문서 生出・源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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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논문 宇垣纏 ワン・パブリッシング 20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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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문서 戦藻録(九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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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서적 私兵特攻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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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서적 私兵特攻 1985
[103] 서적 神風特別攻撃隊の記録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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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서적 白菊特攻隊 光人社NF文庫
[108] 서적 私兵特攻 (株)新潮社 1985-07-15
[109] 학술지 聯合艦隊参謀長 宇垣纏 "鉄仮面"の素顔と八月十五日の"私戦"
[110] 웹사이트 大分海軍航空基地「最後の特攻」 地域住民が慰霊祭:朝日新聞デジタル https://www.asahi.co[...] 2021-08-17
[111] 문서 海の武将
[112] 서적 海の歌声 行政通信社
[113] 서적 (Harvnb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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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문서 蝦名 特攻機
[118] 문서 蝦名 特攻機
[119] 방송 城山三郎 追悼特集 NHK
[120] 문서 海の武将
[121] 문서 蝦名 特攻機
[122] 문서 蝦名 特攻機
[123] 문서 蝦名 特攻機
[124] 문서 蝦名 特攻機
[125] 문서 死に往く長官 下
[126] 문서 海軍反省会3
[127] 문서 良い参謀良くない参謀
[128] 서적 日本海軍の驕り症候群 上 中公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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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서적 (Harvnb 참조)
[131] 문서 戦藻録(九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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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문서 従兵長、戦藻録(九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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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간행물 官報 (추정)관보 1914-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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